JUSTAO/공정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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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가 아닌 공정한 거래/무역을 통해 3세계의 빈곤문제를 해결하면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WIN-WIN)을 만들기 위해 대안적 운동으로 개인들의 참여/ 동참/ 협력/ 정보의 공유의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함.
6무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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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킨 한국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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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관통한 여러 분쟁들(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식민주의, 독립 전쟁,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끊임없는 전투, 수천 명의 성폭력 피해 여성 및 과부, 고아들과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콩고에서의 전쟁)과 경제적 분쟁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을 일깨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속적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섰습니다.

, 우리는 단순한 교육만으로 인류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문제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공식적인 학교 교육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교육은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이들을 노예로 만들기도 합니다.


세계의 공식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학위를 취득하고 돈을 버는 길을 알려 주려고 합니다. 수많은 공식 학교들이 아이들에게 무기를 들고 자신의 조국을 방어하는 방법을 점점 더 많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 나라의 부를 착취하고, 다른 나라의 기술과 정보를 훔치는 등의 일을 위해 다른 나라를 염탐할지 가르칩니다. 평화로운 세계를 위해, 사람들 사이의 공정한 관계를 위해 아이들의 정서심리적 상태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내팽개쳐 둔 채 말입니다.


공식 학교에서의 무책임하고 부적합한 교육 때문에 세계적으로 잔혹한 테러 단체들이 생겨나고 또 자라나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민중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적대(敵對)가 점점 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해결책은 민주 교육(Demokrata Edukado)’에서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들은 학교를 세워, 인류를 위협하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생들이 새로운 교육학과 심리학을 배우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콩고에도 개인들이 설립한 학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목적은 다릅니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인 학교들이지요. 콩고의 사립 학교들은 돈을 벌려고, 심지어 교육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한 학생들에게도 좋은 성적을 줍니다. 그런 학교들에서 수업료는 무척 비쌉니다. 사립 학교와 공식 학교(국공립 학교) 사이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생각해 낸 것은 학생들이 인권, 윤리에 관한 과목과 리더십 과정을 배울 수 있는 학교였습니다.

하지만 재정적 어려움에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어느 재단과 접촉하였습니다. 그들은 70만 달러의 재정 지원을 약속했지만, 헛된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올바른 교육을 위한 첫 번째 씨앗을 뿌리기 위해, 우리는 <착한 마음 연대(SBV; Solidareco Bona Volo)>라는 학교를 세우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우리는 <착한 마음 연대>가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 역할도 해야 한다는 걸 고려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위한 인권 수업, 윤리 수업, 평화 수업, 리더십 수업을 시작했지만, 계속 재정 문제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착한 마음 연대>는 아이들 교육에 알맞은 장소를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을 위해, 평화와 인권 등의 가치 있는 수업을 준비하는 데에도 제게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재정적 어려움과 적당한 장소가 없다는 사실 외에도, 우리는 전 세계에서 우리와 목적을 함께하는 협력자들(NGO, 개인, 학교 들)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협력의 목표는, 아이들이 <착한 마음 연대>의 보살핌을 받으며 효과적인 교육을 받게 하려는 생각을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어느 독일 재단과 접촉했습니다. 그 재단은 저 또는 <착한 마음 연대>와 협력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메시지를 받은 뒤, 연락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우리는 미국의 <민중을 위한 민중(People for People)>이라는 단체와 접촉했습니다. 우리의 협력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계획에 따르면, <착한 마음 연대>의 어린이들과 전 세계 어린이들의 교류가 일어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마의 어린이들은, 주로 같은 학급으로 구성된 다른 나라 어린이들과 교류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착한 마음 연대>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교류할 학급을 찾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과 협력하려는 학급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계속 협력자들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민주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다 20124월에 르완다 키갈리에서 스페인 에스페란티스토인 페드로 에르난데스 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한국의 서울에 사는 카라 안(Kara An)이라는 에스페란티스토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에스페란티스토 삼총사가 되었습니다.

지난 6월에 저와 저희 학생 가운데 한 명을 위한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올해 7, 저와 카리네 아지자라는 여학생이 한국의 서울로 비행기를 타고 왔습니다. 우리가 서울에 온 목적은 세계민주교육한마당(IDEC)에 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대안학교들의 후원금 덕분에 우리의 여행이 이루어졌습니다. 한국 에스페란티스토들의 후원과 동행 덕분에 한국 내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착한 마음 연대> 내에서 민주 교육을 위한 수업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대안학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콩고에서 교육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대안적이었음에도 말입니다. 한국으로 여행 온 덕분에 처음으로 대안학교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저는 부모님들에 의해 대안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식 학교에서 적합하다고 여기지 않는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공식 학교에서는 사람의 행복을 적합한 교육으로 여기지 않으니까요. 대안학교 사람들은 사람에 관해 말하면서 인종과 성에 따른 차별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공식 학교의 교육은 정부의 이기적인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보다는 정부의 지속성이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정부가 지속되기 위해서 사람들은 정부의 배타적 이익을 위해 착취하고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국가들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소규모 테러 집단이 자꾸 생겨나는 등의 일이 일어납니다.


한국에 머물면서 기쁘게도 여러 지역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지역들에는 대안학교들이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방학이라서 많은 학생들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대화를 했고, 그분들은 자신의 학교와 수업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가 산내마을에서 <실상사 작은학교>를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학교의 사무국장님 말씀에 따르면, <실상사 작은학교>에는 평화 수업, 한국어, 수학, 농업, 과학, 사회학, 현대 음악, 전통 음악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드라망 대학>도 방문했습니다. 물론 언어적 장벽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프랑스어와 에스페란토로 말하는 동안, 대부분의 학교 운영진들은 한국어와 영어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대안학교들은 공식 학교에서 적합하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면 에스페란토도 대안언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실상사 작은학교>에 협력을 요청했습니다. 그들로부터 이메일 주소와 홈페이지 주소를 받았습니다. 희망컨대, 우리의 협력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콩고에서는 학교를 다니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안학교에서 우리가 여성들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여성들이 대안학교에 참여한다는 점을 우리는 좋아했습니다. 우리에게 순수의 시대가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전통에서는 열두 별자리(황도 십이궁)에서 순수의 시대는 여성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대안교육에서 여성들의 헌신은 어린이들이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합니다. 어린이들의 교육에는 어머니의 사랑이 소중합니다.


저는 손잔타(Sonĝanta) 씨의 헌신과 에스더(Esther), 민민(Min-min), 그란다(Granda) 씨의 협력을 보며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학생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여성들에게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커다란 정신적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한국 여행은 늘 기억에서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씨 착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부산에서는 손님을 정겹게 맞이하는 살가운 에스페란티스토들을 만나 기뻤습니다. 그들 방식의 에스페란토 표현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소통은 원활하게 이뤄졌습니다. 사람들이 에스페란토에 한국어를 섞어 쓸 때도, 부산 에스페란티스토들은 에스페란토의 규칙을 존중했습니다. 그들은 에스페란토를 실제로 썼습니다. 부산 에스페란티스토들에게 에스페란토는 진실로 우정을 맺는, 친구 사이의 다리가 되는 언어였습니다.

한국에서 우리는 친구들의 착한 마음씨에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카리네는 말이 없는 소녀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에스페란티스토들 덕분에 그녀는 수다쟁이가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파즈(Paz), 카라 안(Kara An), 디아블로(Diablo), 수노(Suno), 엘테나(Eltena) 같은 사람들이 그녀를 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이곳 고마에 와서도 그녀의 말수는 줄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기서는 카리네의 수다스러움에 모두들 놀랍니다.


한국에서의 여행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친애하는 손잔타, 개울가에서 보낸 즐거운 시간은 저를 어린 시절로 돌려보냈습니다. 물론 카리네도 개울에서 놀았던 적은 처음입니다.

여러분의 열린 마음은 <착한 마음 연대>의 어린이들을 여러분의 양녀, 양자로 삼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부자가 아니지만, 인류가 하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고통을 여러분은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콩고민주공화국의 고마에 있지만, 늘 우리의 우정에 대해 생각합니다. 카라 안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것이 영원하기를 희망합니다. 우정은 하늘에 그 근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여러분 가운데 부처를 믿는 분이 계시다면, 우리는 <지금의 친구는 전생의 가족(아버지 또는 어머니, 형제 또는 자매, 삼촌 또는 숙모, 손자 또는 손녀)일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민주교육한마당의 마지막 날은 우리에게 몹시 향수병을 앓게 하는 날이었습니다. 세계민주교육한마당에 참여한 사람들과 헤어지면서, 저는 마치 제 몸의 일부를 누군가 잘라버린 것 같은 아픔을 느꼈습니다. ‘언제, 어디서 이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자문했습니다. 카라 안과 다른 사람들이 저를 유심히 관찰했더라면, 제가 몹시 슬퍼하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계민주교육한마당 덕분에 저는 광명시청의 사무관과 만날 수 있었고, 그는 <착한 마음 연대>에 관해 저를 인터뷰했습니다. 친애하는 파즈가 통역을 해 주었습니다. 언젠가 광명시의 지원으로 콩고에서 민주교육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주신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의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들이 구체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으로부터 받은 가장 소중한 선물은 정성껏 손님을 맞이하는 여러분의 착한 마음씨입니다. 우리를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지지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친구,

알폰스 와세카 (고마시, 콩고민주공화국)

www.solidarecobonavolo.weebly.com

 

번역: 파즈 paze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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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아프리카 여행에서 쓴 글

아프리카 인들에게 나무는 어떤 존재일까?

과거 밀림이나 정글 속에서 살던 시절 그들에게 나무는 삶의 한 부분으로 각인되기도, 아니면 커다란 초자연적인 힘의 상징이나 형상물을 나타내게 하는 도구물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외국 다국적 기업의 자본이 선진국의 원자재 수급을 위한 공급처로서 대규모 벌목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그 나무들은 하나의 자연물의 형태로 숭상되거나 아니면 그것을 이용한 다양한 삶의 도구들과 형상물들이 아로새겨지면서 자연은 자연대로 자신들을 지키며, 인간은 자연을 삶을 이어가는 안식처로서 상호 공존이 가능한 탈바꿈의 안식처로서, 지금처럼 급속한 속도의 정복자로서 파괴의 군상이 아닌 조금씩의 변화를 자연과 타협하며 생명을 공존을 꿈꾸었을 것이다.

 

이제 자연은 자신의 분노의 파토스를 인간에게 내 뱉으며 그것을 고스란히 돌려주려고 하고 있다.

그 고통의 질곡은 당연히 그 안에 살고 있는 거주자들의 몫이다.

 

아프리카 나라들 중에서 가나는 아프리카 예술, 특히 손으로 만든 목 공예품이 발달한 나라들 중에서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동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탈 (하회탈)이 이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무수히 많은 나무 조각 예술품들을 보면서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샤만적 의미 보다는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예술적 평가가치는 색다르게 다가간다.

 

아프리카와의 공정무역을 통해 사전에 1차로 보내온 나무 제품들의 샘플들을 보면서 몇 가지 조사되고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되는 몇 가지 것 중에서 이러한 제품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며, 유통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하면서 특히 나무 예술작품들과 생활용품을 만드는 공동체 분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한 만남을 통해 그 동안 내가 우려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이 해소 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을 지니면서 여행을 시작했다.

   

자본의 논리로 공동체가 굴러가지 않을까라는 우려, 환경적으로 과연 나무로 만든 제품이 타당할까?  하나의 이수시게를 만드는데도 자본이 나무를 베어낸다면 그것은 환경파괴이다.

하지만 공동체가 살아가기 위한 조건으로 오래 전부터 삶의 영역으로 이어지고 있다면 그것을 우리는 다르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은 수공적인 도제형식을 통해 가족 공동체라든지 마을 단위 공동체가 유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통 탈이나 목공예품을 만드는 공통체들은 도심에 작은 공방을 내어 자신들의 판로를 스스로를 개척한다.  도시에서 사는 부족민과 시골의 부족의 공동체는 나무제품의 모든 공정에서 각자의 역할이 나누어지고 있다.  채취, 가공, 완성, 운반, 판매의 과정이 모든 것이 수공업적인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그들의 공동체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 많큼 나무는 그들에게 중요한 삶을 지탱해 주는 소득원이며 자원이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 나무에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그들과 나누었다.

 

나무 제품을 만드는 제품은 대개 4-6가지이다. ( SESE, FUTUM, MAHOGANY, CIDA, NYUME AUA ) 그 중 마호가니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무차별적 벌목으로 인해 생산이 감소되어 있기에 아프리카 사정을 물어 보았다.  쿠마시의 아산티라는 분은 내가 많은 나무이름을 말하자 놀라면서 아프리카 역시 비슷한 실정이라고 한다. 다만 20년 이상 자라는 목재인 경우 대가구들을 만들 때 주로 쓰이는데 목공예품의 경우는 주로 수종이 좋은 세세나 다른 것들을 쓴다고 한다.

 

이처럼 대규모 벌목 사업으로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는 방법은 공동체 스스로가 마을의 나무들을 스스로 관리하는 방법이다.  조금만 들어가면 농장들이고 울창한 산림이기에 가지치기 벌목을 꼭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하는 것도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한다.

 

특히, 내가 많이 본 나무 가구 종류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등가구와 대나무 가구 제품등 이다.  물푸레 나무 같은 종류로 가나 어디에다 가면 만날 수 있는 종류의 나무 줄기를가지고 삶의 다양한 예술품들을 대단히 소규모로 분업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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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크라 시내에 있는 가구 만드는 공동체인데 마을 청년들이 주로 도심에서 일한다. 현지에서는 그 마을을 이끄는 족장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이것을 만드는 일을 한다고 한다.  소규모 가구 공동체이다. 이런 곳이 시내에 몇 군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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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리카 전통 북 종류인 잠벨이다.  가나 북부 지역 전통 북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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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접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어 1시간 동안 지켜 보았다.   이 가족 공동체는 잠벨 북 종류만 만드는데  이 번에 북을 50개 정도 들여오려고 한다.  일단 소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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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무 실로폰이다. 촌스럽게 생겼지만 소리가 기가 막히다.  크기가 다양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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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악기를 밑에 서 찍은 사진인데 밑에 박을 달아서 공명을 내는 것이 특색있다.  이 번에 갈 때 샘플로 하나 가져간다.  길바닥 공연 때 한 번 선보이려고 하는데 될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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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나 전통 나무 탈을 제작하는 분인데 판매의 모든 것을 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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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은 이렇게 마을 공동체에서 만들어진다.  노인들은 옆에 앉아 지도하고, 오른 쪽에 있는 사람이 이 마을 책임자이다. 생산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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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자만 종류만 생산하는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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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산티라는 분인데 나무 가구와 탈의 유통의 총 책임자이다. 구마시에 있는 국립 문화 공원에 있는 나무 제품의 전시와 유통을 관리하고 있으며 내가 가고 싶고 보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데리고 간다.  실제로 구마시는 아크라 북쪽 중앙에 있는 4시간 거리이다.  새벽에 가서 하루 밤을 묵으며 여기 저기 다니느냐고 힘이 들었지만 가나의 목공예품을 이것 저것 보여주려는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쿠마시에서도 많은 분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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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기 제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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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여행을 통해 아이누 공동체. 아이누 학교를 운영하고 계시는 키타가와 시마코 (아이누 민족운동가)여사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간 기간이 방학 기간이여서 학생들이 없었는데 일본 전역에서 활동가들이 와서 자원봉사로 이루어진 비인가 대안학교이다.   그곳에서는 학생들에게 아인누 문화와 글, 언어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현재 학생들이 점점 줄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아파왔다.

 

 삿뽀로에서도 차로 4시간 정도 들어가야 마을이 나오기에 외지인들의 방문이 낯설게 보였지만 시마코 여사님은 이미 2001년에 한국을 방문해서 아이누 실상에 대해 강연도 한 적이 있는 분이다. 그 때 한국 사람들에 대한 좋은 감정이 대단해서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주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많은 아이누 관련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지 모른다.

 

    제대로 전부 이해 하기는 힘들었지만 아이누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아이누인들에게 일본인들이 ‘너희 조상은 한국인이니 한국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는데 시마코 님은 아마 자기 조상이 한국인일지도 모른다며 그렇기에 우리를 더욱 반기셨다고 한다. 떠나는 우리들에게 손수 만든 손가방, 수제품들과 아이누 동화책 등을 주시면서 꼭 다시 한 번 또 오라고 하시던 그 모습이 잊혀 지지 않고 있다.  한 번은 글을 써야지 하면서도 아직까지 아이누관련 글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짧은 만남 속에 전해오는 절절함을 표현할 수 없어서인지 모른다. 

 

아프리카 여행 중에도 그 곳의 선주민들을 만나면서 아이누 선주민들이 생각났었다.

다른 비유겠지만 제주도의 경우 그곳에서 자신들의 터전에서 삶을 살고 있는 선주민들의 경우 현재 대다수가 관광산업 (호텔 종업원, 골프장 케디, 택시기사, 기념품 판매, 식당 등) 종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관광으로 땅 값이 올라가더라도 정작 돈을 버는 사람들은 그곳에 호텔을 짓고 골프장을 짓는 거대 자본이다. 대다수의 주민들이 거기에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 

 

  하와이 선주민들의 삶도 역시 처음부터 관광객을 상대로 ‘알로 하와이’나 추는 민족은 아니지 않은가?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대륙 전체가 가난으로 몰린,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대륙이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로 변해버린 작금의 현실은 그 곳을 침략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죽지 않을 만큼의 기부와 원조를 통해 사회적 문제와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는 아프리카의 문제가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닌 자신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전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빌게이츠도 아프리카 문제를 풀 수만 있다면 자기 재단의 돈을 다 써도 좋다는 말을 했을 정도니 아프리카 문제를 해결해야 컴퓨터도 팔 수 있다는 계산이 들어간 고도의 경제적인 핵심의 속성을 내 뺍고 있다.

 

 식민지 아니면 제국주의 중 둘 중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냉험한 역사는 현실 속에서도  빼앗긴 자들과 뺏긴 자들의 관계로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나는 진행형이다. 그 안에서도 자본의 감쳐진 야수성은 여지없이 들어난다.  그 야수성에 대한 투쟁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고 계속 될 수밖에 없다.  

   

< 아이누에 대해 >

 아이누는 원래 아이누어로 ‘인간’을 뜻하는 말이다.

이들의 땅, ‘아이누모시리(아이누어로 인간의 대지를 의미)’에서 아이누가 소수자의 위치로 밀려나면서 일본에 강제로 편입된 과정은 수 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에도시대 이래 몇 백년간 일본인은 아이누 민족, 아이누 모시리 전지역, 즉 홋카이도뿐만 아니라 쿠릴 열도와 사할린(카라후토)에 대해 도대체 무슨 일을 해왔는가를 보면 일본의 침략성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일본인은 무기를 가지고 아이누 모시리를 대상으로 아이누 민족 박멸작전을 몇 번이나 실행해 왔다. 거기에 대항하여 아이누 민족은 1457년 쿠샤마인 전투, 1669년의 샤구샤인 전투, 1789년의 쿠나시라와 매나시리 봉기를 통해 무장하여 싸웠다.

 

  본격적인 정벌의 역사는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국가가 수립된 뒤 시작되었다.  1869년 개척사(開拓使)를 설립하고 에조치라는 명칭을 홋카이도[北海道]로 바꾸었다. 1899년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 구토인 보호법>을 만들었다.  본토 인구 증대로 인한 영세 농어민을 홋카이도로 집단으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아이누인들의 토지의 수탈, 강제이주를 시켰으며 여기에 반항하는 이들은 학살당했으며. 개척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아이누인들을 구토인(舊土人)이라고 부르며 민족 말살의 동화 정책을 펼쳤다. 근대 국가 ‘일본’과 아이누 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문명의 ‘진보’를 상정한 진화론적 시각에 입각한 것이었기에, ‘미개하고 열등한’ 존재인 ‘구토인’ 아이누는 동화교육을 통해 일본인과의 차이를 분쇄시켜야만 ‘문명화’될 수 있는 존재로서 간주되었다.

 

 아이누를 개명(開明)시킨다는 명목으로 풍습의 개변(改變)을 강요하였고, 아이누의 언어와 전통적 생활양식은 금지되었다. 아이누가 가지고 있었던 어획권과 어로방식도 무시되었고, 아이누는 농업과 목축을 강요당했다. 이로써 오랜 기간 어로와 수렵, 채집 등을 위주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꾸어왔던 아이누의 전통적인 문화는 급속히 파괴되었으며, 대대적인 학살과 약탈과 침략과정에 유행성 질병(천연두, 콜레라, 매독 등)과 감염으로 저항력인 약한 아이누인들의 인구는 격감되었고 특히 성 침략으로 인한 매독의 만연을 수반했다.

 

아이누 민족의 종교적 의식, 조상들의 묘지와 주거지들이 파괴, 수렵과 연어 포획을 자유롭게 하던 것이 일본인의 손에 관리하게 하였다. 대다수 선주민들이 그러하듯이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겨버린 이들이 선택하는 것은 자신들의 터전을 찾아 더 깊숙이 들어가거나 침략자들의 하수인으로 전략된 삶을 타자들에 의해 강제 받게 되는 것이다.

 

 메이지 시대 이래의 일본은 아인누 모시리에 대한 침략과 동시에 아이누 민족을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희생되었으며, 일본의 국가에 이용된 뒤 버려졌다.

 

 최근 일본정부는 아이누 민족을 ‘일본의 소수민족’으로 인정했지만, 결코 선주(先住)민족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거기에는 아이누 모시리에 대한 침략과 함께, 가혹한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토라리 현의 원자력 발전소, 핵폐기물 처리, 저장, 연구시설 호로노 비쵸,  골프장 건설, 산림벌채, 리조트 개발 등이 개발이라는 명복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신대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의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자국 내 문제인 아이누 대한 공식적인 사과의 부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듯이 제국주의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한 그들의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일본 정부가 아이누인들에게 대해 전향적인 자세로의 전환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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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elippe 집에서 케짤떼랑고(Quetzatelango- 이하 쉘라)는 멕시코를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도시이다. 왜냐하면 과테말라에서 멕시코를 육로로 넘는 국경은 몇 개가 있지만 치아파스 지역을 여행하기에는 메실야(Mesilla) 길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통이 불편해서 몇 번의 치킨버스를 타야 하는 고생을 감수해야 한다.

 


과테말라의 제2의 도시인 쉘라(Xella)의 블렉켓 오스탈에서 하루 묵으며 도심의 이곳 저곳을 구경하였다. 도착한 날이 축제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광장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축제 행렬과 먹거리들을 구경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메실야 국경을 향해 출발했다.

 



Xella-
메실야(Mesilla) 국경을 오는 길은 험한 산길을 이다. 도착한 다음 툭툭을 이용 출입국 사무실까지 다시 멕시코 출입국 사무실은 4km가 넘는 거리이다.  

 

줄지어 있는 택시를 보고, 타기는 타야겠는데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버스가 없냐고 계속 물어 보았다.  무슨 담합이라도 했는지 모두 택시를 타고 가라고 한다.  한 참을 시도 끝에 내 행색이 안되어 보였는지 친절한 가게 청년이 앞에 세워둔 작은 트럭을 타고 가라고 한다. 여행의 경험상 이럴 때는 뒤도 안보고 무조건 타야 한다.

 


트럭 위에 서있는 여인네가 배낭을 반갑게 올려준다. 멕시코 출입국 관리소 까지는 꽤 먼 거리이다.  걸어서 가기에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거리이기에 공짜로 얻어 타는 것이 미안해서 돈을 주려고 하니까 여인은 그냥 가라고 한다.  무쵸 글라찌아스를 두 번 반복하며 멕시코에 대한 첫 인상을 각인시켰다.  중미의 가난한 인디오들은 단돈 얼마라도 벌기 위해서 여행자들에게 친절을 베푼다. 돈을 떠나 친절을 받은 사람은 단 몇 푼이라도 그 것에 대한 답례로 주어야 하는 게 여행자들의 미덕이다.

 


간편한 입국심사를 마치고 산크리스트발(San Cristobal)를 가려고 했지만 이미 버스는 오후 2시에 끝겼다. 늦은 시간(4시가 넘어가서)이라서 콜렉티보 역시 없다. 중간 도시인 코미탄(Comitan)으로 무조건 궤도 수정하여 콜렉티보를 탔다. 이것도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아니면 택시로 이동해야 하기에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코미탄을 갔다.

 

코미탄은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상점들과 작지만 고풍스럼움을 간직한 예쁜 마을이다.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이름도 없는 작은 마을들은 언제나 새롭고 포근하다는 느낌이다. 이런 마을들은 하루, 아니 몇 시간이면 광장을 중심으로 마을을 다 볼 수 있고,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적어 주민들이 친절하고 물가도 착한 가격이기에 여행의 지친 심신을 풀 수 있다.

 


모르는 도시나 마을에 도착하면 터미널에서 무조건 센트로를 물어 걸어간다. 작은 마을들은 보통 십분 정도만 걸으면 마을의 윤곽을 짐작할 수 있기에 센트로 가까이 있는 제법 큰 호텔에 들어가서 한 명 도미 가격을 알아 보았다. 역시 비싼 가격 250 페소 이다. 가격이 안 맞으니 100페소쯤 하는 숙소를 알려달라고 하니 친절하게 몇 군데를 길 가까지 나와서 어디로 가라고 가르쳐 준다.

 

도착한 곳은 작은 유스텔 비슷한 곳, 가격은 80페소 작지만 조용하고 아담하다.  짐을 풀고 중앙광장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잠시 구경하고 마을을 탐험하였다. 인포의 직원한테 지도를 받으며 마을 사람들이 잘 가는 식당을 물어, 찾아 간 곳은 정말 마을 분들만 오는 곳이었다. 가격도 싸지만 멕시코의 치아파스 지역의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처음 방문한 코비탄 마을 덕분에 멕시코가 점점 좋아진다..  

 


세상에는 착하게 생긴 사람들이 많다.  이곳 멕시코 산크리트발에서 묻게 된 바빌론(Babylon) Hostal에서 일하고 있는 젊은 이태리 친구 안젤로를 알게 되었다. 30대 초반인 그는 멕시코를 여행 왔다가 산 크리스트발이 너무 좋아서 3개월 넘게 일하고 있는 친구인데 성격이 너무 동양적이다. 과거 그가 지독하게 사랑한 일본인 애인을 못 잊어서 그런지 동양 문화에 대해 무척 많이 알고 있다.



그가 하는 일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주인(주인도 이태리인이다) 자리를 비우면 Hostal을 관리한다. 이 곳 주인은 정말 싸가지가 없는 이태리 출신답게 철저하게 개인주의의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 Hostal에 손님이 별로 없다.  2틀을 머무는 동안 주말인데도 6인 도미를 혼자 사용했다. 손님이 없기에 안젤로 역시 낮 시간의 대부분을 자기 먹을 요리를 위해 시간을 보낸다. 간단한 스파게티 만드는데도 2시간 넘는 세심한 정성을 들인다.

 

시간 만 나면 서툰 에스파뇰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태리의 가족 이야기, 사랑이야기, 요리 등.. 천천히 정성 드려 만든 손수 만든 요리를 우아하게 천천히 즐기는 그에게 전혀 이태리 남성 같지 않다고 하자, 자기가 내성적이라서 원래 사람들 하고 이야기를 많이 안 하는데, 나하고 많이 한다고 한다.



그는 치아파스 지역에서 중심적인 도시인 산 크리스트발에 대해 많이 알려 주었다.  산 크리트발은 언제나 사람들을 북적이는 생동감 있는 도시이다. 코비탄의 조용함 속에서 있다가 와서 그런지 산 크리트발의 도시가 낮 설었지만 시간이 많다는 핑계로 안젤로가 이 곳 저 곳을 안내해 주었다. 광장에서 열리는 단편영화제와 다음날 저녁 이태리 벨라노바(Belanova) 그룹이 하는 콘서트도 함께 가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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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를 가기 위해서는 과테말라를 들러야만 한다. 여건상 과테말라를 체류하기에는 여러가지가 힘이 들것이라 여겼었는데, 프랑스 에스페란티스토인 Philippe 과테말라 파나하첼(Panajachel) 아티틀란 호수(Lago Atitlan) 위에 자신이 지은 집이 있다고 여행 지나가면 언제든지 사용하라고해서 즐겁게 머물기로 했다. .

 

게바라가 혁명이 끝나면 가장 살고 싶어 했다는 아티틀란 호수를 보고 싶은 바람도 갖고 있었지만 그동안 중미 여행을 하면서 니카라과 호수와 코스타리카의 아레날 호수의 아름다음에 흠뻑 취한 나로서는 이티틀란 호수는 호수들과의 비교 대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라나다에서 이른 새벽 자전거로 달리면서 니카라과 호수는 거대한 바다 같은 웅장함 속에서 풍겨 나오는 신선한 에너지였다면  코스타리카의 아레날에서 리베리아를 가는 차장 밖의 아레날 호수의 끝없는 정경은 호수와 그것을 둘러싼 마을과 풍경들이 포근한 아름다움 자체이다.

과연 아티틀란 호수는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보여 줄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우선 파나하첼을 가기 위해 유네스코가 도시 전체를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안티구와 (Antigua)에서 이틀을 쉬면서 구경하였다.


  


중남미 도시의 아름다음은 스페인 여행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스페인풍의 도시의 발견 이었다. 중미의 역사적으로 오래된 도시 문명들 거의 폐허로 변했거나 아니면 도시로서의 기능이 아닌 유적으로 격리된 이었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 하나의 유적이며 역사이다. 하지만 스페인 유적의 잔재물들은 700 간의 스페인 식민지 삶들과 애환의 역사가 녹아들어 도시들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페루의 쿠스코나 에콰도르의 쿠엥카 역시 과거 스페인 건축물들이 도시의 랜드 마크로서 자리잡고 있으며, 과테말라의 안티구와 역시 아기자기한 목조, 석조 스페인 풍의 건축물들이 많아서 도시를 찾는 여행객들을 과거로 즐겁게 데려다 준다.

 

스페인 코르도바의 이슬람 정원과 석회 등을 이용한 장식을 만날 있었고, 살라망카에서 바로코 석조 건축물들은 안티구아 도시의 일반 주택과 이글레시아(성당) 아름답게 변모 시켰다. 또한 도시를 처음 찾는 이방인들을 위해 만든 같은 도심의 중앙 광장인 플라자 마요르는 한 눈에 그 도시를 스페인 풍으로 친근하게 만든다. 
 
 

 


주소 Panajachel 에서 Godinez 방향으로 104 km.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Philippe 알려준 전부이다. 덧붙여 찾기 쉽다는 것이고, 가면 Pedro 라는 인디오 할배가 있으니 그에게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황당한 주소를 가지고 찾아가는 것도 웃기지만 우선 집이 궁금했다. 그가 보내온 내용은 그의 집이 쉬어가기에는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안티구와에서 버스로 3시간 걸려 파나하첼에 도착하였다.



눈에 아티틀란 호수가 들어온다. 다시 마을버스를 기다려 기사한테 주소를 보여주니 무조건 타라고 한다. 20분쯤 갔을까 여기라고 중간에 내리라고 한다. 마을과 집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도로 가에서 내려서 보니, 밑에 보이는 것은 아티틀란 호수 , 온통 산으로 둘러싼 호수의 정경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도통 물어볼 사람도 없고 배낭을 매고 어디로 가야 집을 찾을 있을까 한참을 왔다 갔다 했다.  때마침 지나가던 경찰차가 있어 주소를 물어보니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면 Organic Mielo라는 팻말이 집이라는 것이다. 주소는 밖에 없다는 것이다.


집이라고는
있을 같지 않은 곳에 거짓말 같이 채가, 그것도 무슨 집이 모양으로 만든 의아스럽게 생긴 집이 나무들로 가려져 있었다. 저게 정녕 집이란 말인가 정도로 비록 오래 되었지만 제법 운치있게 지어진 집이 호수를 바라보며 있는 아닌가?

 

Hola
연신 외치자 나이는 들었지만 마음씨 좋게 생긴 페드로 할배가 나왔다. 짧은 스페인어로 한국에서 펠리페 친구라고 하자, 왔다고 방으로 안내한다.  나중에 사실이지만 페드로 할배 역시 스페인어가 서툴다. 과거 스페인 식민지가 끝나고도 성경을 과테말라에서 스페인어로 가르치려고 하자 국민의 60% 지방의 인디오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실패하고 말았다는 일화도 있지만,  추투힐(Tzutuhile)이라고 불리는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여자들의 경우 전통 복장인 화려한 블라우스 위필(huiple) 머리 주변에는 손으로 천을 두르며 남자들은 카우보이 모자를 쓴다.

 


갑판 밑으로는 방들이, 위로는 호수가 훤히 보일 있게 만들어져 있다. 문명과 동떨어져 살기 위해, 그리고 과테말라 산악의 토종 꿀을 채취하기 위해 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들도 없고 마을도 없는 곳에서 아침 햇살을 받은 호수가 다이아몬드 불빛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음에 흠뻑 취했다. 저녁에는 화산 너머로 지는 석양이 호수에 반사되는 모습을 놓고 바라 보았다. 호수가 폭의 동양화 같고, 하나의 서정시처럼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전기가 필요 때는 발전기를 돌려 충전하지만 평소에는 전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둠이 찾아오는 7시부터 잠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이리도 밤이 긴지 여기 와서 알게 되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도통 시간을 없는 어둠 뿐이다. 새벽이 되어서야 서서히 밝아오는 호수를 보며 아침이 오고 있음을 있다. 아침 해가 올라오기 하얀 뭉게 구름처럼 피어나는 물안개 호수는 페루의 마추피추에서 바라보는 안개와는 다른 신비감이다.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지역은 중미의 다른 보다 선선하다. 땅은 척박하지만 강렬한 태양을 피할 있고 호수에서 나오는 다양한 물고기들이 단백질을 공급해 주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원주민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 이다. 어쩌면 문명의 범람을 피해 사람들의 발길이 어려운 곳으로 이주해 왔을지도 모른다. 산을 넘고 호수를 건너, 파나마의 산블라스 군도를 여행 때에도 도저히 사람이 없을 같은 오지 섬에 짓고 힘들게 바다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디오들을 바라보면, 그들이 진정으로 파라다이스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끼를 먹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가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  보관이 어렵기 때문에 욕심 필요 없이 식구들 먹을 만큼만 잡으면 된다. 거기에 텃밭에서 어렵게 자란 채소 조금과.
 

 


여기서도
역시 하루 종일 먹을 것을 걱정하게 되었다.  페드로 할배가 따다 아보카도와 또르티야 전병이 하루의 식사이다.  내가 하는 일은 화덕에다 커피를 끓이는 일이다. 가까운곳에 파는데도 없기에 조금 남은 비상식량 (건과류) 아껴서 먹었다. 하루 종일 호수를 바라보며 페드로 할배와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심심하면 내일쯤 파나하첼이나 고디네스에 가라고 한다. 걸어서 파나하첼은 2시간, 고디네스는 1시간 가야 한다. 호수를 끼고 걷는 것도 좋을 같아서 같이 가자고 했더니 웃으며 그러자고 한다.



다음
아침 일찍 고디네스를 갔다. 그래도 마을인지라 사람들도 북적인다. 채소랑 산에서 과일, 곡물류도 파는 작은 장도 있고.. 식품점도 있다.  속과 호수에 사는 인디오들이 이런 마을을 중심으로 만나고 물건을 팔고 있는 같다. 이동할 있는 운송수단도 눈에 많이 띤다.

 

나는 Philippe 집에서 4 5일을 머물렀다. 시간이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아무도 없는 선박에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하고 호수만 바라보며 지냈다. 아트틀란 호수를 떠나면서 머리 속에 박혀있는 호수의 수채화 같은 그림들을 과연 잊을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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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에서 다음의 여행 노정을 어떻게 잡을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온두라스- 과테말라- 멕시코로 향하는 길을 잡게 되었다.

온두라스는 코판 유적지를
꼭 보고 싶어서 바쁘게 레옹에서 국경 도시
치난데가 (Chinandega), 여기서 다시 온두라스 국경 마을 구아사블레(Guasble)로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그리고는 다시 온두라스 수도인 데구치갈파(Teguchigalpa), 수도보다 훨씬 잘 꾸려진 북쪽의 도시 산페드로 데 술라 (San Pedro de Sula)로 향하였다.

한 나라를 스치며 가로질러 간다는 것이 어찌 보면 여행했다고 말 할 수 없지만 그동안 중미를 돌아보면서 느끼지 못했던 마야문명의 흔적을 온두라스에서 찾고 싶었다.


내가 아는 짧은 중남미 역사 속에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축구로 인한 전쟁이 있다. 시발점은 축구가 되어 주었지만 이전부터 누적된 국경선 분쟁이 이로 인해 터져 나온 것이다.


1969
6 15일 엘살바도르의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벌어진 온두라스-엘살바도르간의 월드컵 중남미 2차 예선전 중 3:0으로 온두라스가 패배하자 자국 팬들의 공격으로 온두라스 선수 3명이 집단구타 당해 사망한다. 여기에다 경기장에 있던 엘살바도르 관중들과 시비가 붙어 대규모 폭력사태로 번지게 되어 많은 온두라스인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 소식을 듣고 같은 시각, 온두라스에서도 엘살바도르인에 대한 사냥이 벌어져 엘살바도르인들이 살해된다. 온두라스 정부는 이후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엘살바도르인에게 추방명령과 수입금지 조치를 내린다. 이에 맞서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 정부에 항의하며 자국 교민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으나 온두라스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한술 더 떠 엘살바도르인의 이민금지령을 내리자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를 세계 인권위원회에 제소한다.

 

그 뒤를 이은 국교 단절, 월드컵 최종 지역 예선전의 무승부와 함께 몰고 온 7 14일 전쟁 포고, 627일 중립지역인 멕시코시티에서 두 나라의 최종전이 열렸다. 이 날은 관중보다 경찰이 더 많았으며 경기는 난폭했다. 결과는 22무승부라서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연장 전반 12분 엘살바도르의 로드리게스가 결승골 을 터뜨렸다.
그동안 각종 반정부 운동 및 사회문제를 안고 있던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의 엘살바도르 정권은 축구로 인한 반 온두라스 정서에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면서 전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온두라스 4개 도시의 폭격과 함께 전쟁을 시작한다. 이 전쟁 역시 미국의 개입으로 19일만에 끝이 난다.


니카라과에서와 마찬가지로 온두라스의 산악을 지나면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은, 사람 사는 것은 똑같은데 왜 이리도 차이가 나는지? 그 전해져 오는 느낌이 더 강렬해서 마음이 아프다 

파나마 카리브해에 있는 인디오 집들을 보면 초라하지만 평화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같은 중미 인데도 온두라스 산악지대의 집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유난히 힘들게 보인다. 워낙 산악지대가 많아서 인지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지나가는 여행자 역시 힘들어진다.

 

과테말라와 온두라스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코판(Copan)은 마야문명의 조각품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지이다. 이 작은 도시를 보기 위해 온두라스의 남에서 북으로 다시 서쪽으로 여행을 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산페드로 술라에서 코판의 작은 도시에 내리면 우선 반기는 것은 대중 교통 수단으로 한 몫 하고있는 툭툭이들이다.  이것 저것 두리번 거리며 찾고 살펴봐야 할 것도 많지만 우선 잠자리부터 챙긴다.


숙박은 여행자들의 필수 도서인 론리북을 빌려 적어둔 만사나 호스탈(Mansana Hostal)로 정했다. 다른 곳에 비해 매우 숙박비용이 저렴하다 (5 달러)


잠시 마을을 둘러보고 다음 날 새벽부터 서둘러 코판 유적지로 향했다. 도보로 30분 정도 걸리므로 조금만 서두르면 한 낮의 찌는 태양을 피할 수 있다.  생각대로 사람이 없다.


붉고 황금색으로 장식된 커다란 잉꼬들이 올라!(안녕) 를 목청껏 외치며 정성껏 여행자들을 맞아 주는가 하면 어떤 녀석들은 방문객들을 쌩~무시하며 여기 저기 날아다니고, 또 어떤 놈은 땅을 걸어 다니며 먹는 게 남는 것인 냥  이것 저것 주어 먹기에 열심이다.

 

과테말라에서 여행 온 한 가족을 만났다. 엄마, 아빠, 딸이 코판을 보기 위해 이 유적지에 왔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 라는 분은 역사와 유적에 상당한 조예가 깊은 것 같다. 방문객이 뜸한 한적한 유적에서  그들과 난 코판 유적지를 세세하게 보게 되는 기회를 얻었다.

그와는 비록 언어가 안 통하지만 전문가 수준 이상으로 중앙 아메리카의 문명에 대해 비교 설명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끔씩 돌 조각을 보며 생김새가 아시아의 문양과 비슷하다는 말들과 조각들이 섬세하고 아름답다는 짧은 말 뿐이었다.

 

조금씩 마야문명에 대해 빠져 들고 있을 때 그는 과테말라와 멕시코에 가면 이곳과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저 조금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는 ----마야문명은 아즈텍 문명 발생 전, 중앙 아메리카 전역에서 고도로 발달된 신비스러운 문명 정도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마야 문명의 분포에 대해 간추리면 멕시코의 고산지대인 치아파스지역과 정글지대인 다빠스코 지역, 과테말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벨리즈의 광대한 지역에서 볼 수 있고, 3000 년 전부터 오늘 날까지 이어지는 중미 최고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후에 북쪽에서 내려온 툴텍크 문명에 흡수, 통합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왕이나 그의 가족들의 무덤인데 반해 중앙 아메리카의 피라미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제단이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코판 유적지의 돌 조각 하나 하나에 아로 새겨진 섬세한 문양들과 석조상들은 마야문명의 찬란함을 엿 볼 수 있어 이 곳을 찾아온 여행자를 과거의 세계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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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리카 리베리아에서 니카라과 국경마을은 그리 멀지 않지만 출입국 신고 절차가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입국 시 12불을 내야 하므로 환전이 반드시 필요하고, 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거침없이 달려드는 삐끼들과의 실랑이는 필수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치킨버스행.. 중미에서 치킨버스는 서민들의 교통수단이라서 가격이 저렴하다. 그 착한 비용에는 모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승객 인원 초과는 기본, 2명이 안는 자리는 3명씩 포개 앉아야 한다. 물론 승하차도 자유롭게 어느 곳에서든지 가능하다.


난 중미 여행 기간 동안 치킨버스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어느 자리가 가장 편하게 앉을 수 있는지도 아는 여유까지 생겼다. 하지만 치킨버스에 타는 순간 내 짐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배낭을 보호하려고 그냥 들고 탔다간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더 큰 짐이 된다. 차라리 버스 지붕 위에 올려놓고 목적지까지 나 몰라라 푹 잊고 가는 것이 속이 편하다. 한 번 올려놓을 때 마다 거의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오는 배낭을 볼 때 마다 걱정이 되었지만 현지인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버스 지붕 위에 꾸러미들을 올려 놓는다.



물론 현란한 솜씨를 발휘하는 숙달된 조교(일명: 버스 차장)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려도 돈을 받은 사람과 안 받은 사람을 정확히 구분하여 낑낑 비집고 들어가서는 차비를 받아내며, 승차 하기 전에 들락날락 버스 지붕으로 짐을 올리고 내리고를 수 없이 반복 한다.

 

<혁명의 도시 레옹>

 

역사 속에 살아왔던 사람들,  그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나오지 않더라도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수 많은 민중들이 그 역사와 함께하지 않은 역사는 거의 드물 것이다. 지금도 지구 상에는 그러한 민중들의 역사가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니카라과는 여행하는 동안 묘한 여운이 남는 곳이다.  몇 번의 치킨버스를 이용해서 도착한 그라나다(Granada)라는 도시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지만 스페인풍 건물들이 낯선 방문객들에게 독특함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각인 시킨다. 실제로 바다인지 호수인지 구분이 안가는 니카라과에서 제일 크다는 니카라과 호수를 끼고 도심 안에 예쁘게 만들어진 카페며 바, 레스토랑 그리고 고풍스런 호텔들이 이 나라에 대한 선입견들을 말끔하게 없애 준다.


  

  • 그라나다에서 자전거를 빌려 니카라과 호수를 마음껏 달렸다.

이곳뿐만 아니라 실제로 니카라과는 우선 눈을 즐겁게 하는 여러 가지 볼 거리들이 많다는 것과 물가가 다른 중미에 비해 저렴해서 일반 관광객들이 아닌 여행을 즐기는 북미나 유럽의 배낭 족들에게는 인기가 많다. 실제로 많은 배낭 여행객들이 증가하고 있는 나라이다.

가까운 코스타리카는 관광 인프라가 잘되어있어 여유 있는 투어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여행객, 특히 돈 없는 배낭 여행객에는 그림의 떡!! 고로 주머니가 얄팍한 우리 같은 여행자들에게는 니카라과나 과테말라가 최고이다. 그 중 니카라과에서 내가 제일 인상 깊은 곳을 꼽으라면 레옹이라는 도시라고 말 하고 싶다.

 


니카라과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과거 산디니스타 해방군의 거점 지역이고, 소모사 정권을 물리친 혁명의 도시이다. 지금도 과거의 인물들이 잊혀져 간 과거의 역사 속에 아직도 살이 있는 곳이기에 도시에 머무는 동안 이 도시를 눈으로가 아닌 가슴으로 보려고 애썼다.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니카라과는 중미에서도 못사는 나라에 속하지만 그들에게는 독재에 저항할 줄 아는 끓는 피를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그러한 과거를 자랑스러워한다. 

 

다른 지역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도시, FISL이라는 산디니스타의 로고를 자랑스럽게 붙여놓고 운전하는 택시기사를 보는 것도 이곳만의 특징이다.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

과거와 함께한 역사는 지금의 현실 속에 묻혀져가고 있다혁명 박물관을 운영하고 안내하는   과거 FISL 전사들의 노인들은,   작금의 현실을  아쉬워하지만 과거 그 혁명의 시기에 총을 든   자신의 사진 앞에서는 언제나 자랑스런
혁명가 이다. 
 
 

도심 안에 위치한 중앙공원에서 도심의 안내를 자처하는 Maria 아줌마를 만났다. 처음에 나는 이 여자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삐끼 정도로 생각했었다.  자신이 이 도시를 하루 안내 해 줄 테니 50콜론(3달러)를 달라고 하길래, 나는 처음에는 딱 잘라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좁은 도시에서 가장 큰 바실리카 성당을 중심으로 동선이 이루어지다 보니 3번을 그녀를 보아야 했다.

 

볼 때마다 다정하게 다가와서 자기가 이 도시를 누구보다 잘 아니까 원하는 안내를 해 준다고 한다. 그녀에게 과거 산디니스타 관련하여 이 도시를 보고 싶다고 하고, 또 가이드 비용대신 점심을 대접하겠다고하자 한참 고민하다 그렇게 하자고 한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짧은 대화가 이어갔다.  자신이 산디니스타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자신이 이 일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는 정말 열심히 이곳 저곳으로 저녁 늦게까지, 마지막으로 우리가 찾아간 곳이 그 당시 학생들이 시위하다 죽은 사진들이 있는 초라한 기념관이었다. 많은 사진들 속에 손짓을 하며 이 아이가 자기 동생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를 보는 순간..    왜 그 녀가 이 도시에서 과거의 역사를 알리는 일을 하고 있나 알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Arte musum을 구경하고 나서 그녀를 찾았다.  함께 점심을 먹자고 하면서 돈이 많지 않아 비싼 음식을 사줄 수가 없으니 싸고 맛있는 곳이 어디냐고 했더니, 시장으로 끌구 간다. 여기가 레옹에서 제일 맛있고 싼 곳이라는 것이다. 시장 음식을 함께 먹었다. 한 접시에 고기와 밥과 여러 가지 채소를 올려 스튜 비슷한 것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맛있는 식사를 하였다. 한국에 가서 꼭 연락하라고 이메일 주소를 적고 그녀와 아쉬운 작별을 고해야만 했다.


 
  • 레옹 혁명 박물관을 안내하는 과거 산디니스타 전사, 총을 든 사진을 가르키며   자신이라고 설명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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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중미는 남미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다르게 느껴질까?

중미와 남미, 북미를 지역별로 나누어 보면 북미가 캐나다, 미국, 영어권의 (캐나다 퀘백지역이 프랑스어 사용이 있지만) 선진국이지만, 여타의 중미, 남미 나라들 대부분이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오랫동안 겪으면서 독립한 개발도상국가들이다. 스페인풍의 제국주의 잔흔들이 여기저기 넘쳐나는 곳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브라질과 몇 몇을 제외한 전 지역이 스페인어로 소통이 가능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북미와 중미, 남미는 크게 보면 같은 아메리카 대륙이면서도 다르게 느껴지는 곳이다. 그것의 제일 큰 이유가 식민지 경험의 역사와 아닌 것과의 차이가 아닐까? 그 만큼 중미와 남미는 일찍부터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 역사와 함께 했다. 17-18세기 해상 왕국 스페인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모든 대륙을 통째로 먹었다고 생각해도 될 만큼 크게 그리고 새롭게 재편되는 독립국가까지 그들이 만들어 놓은 후손들에게 의해 새롭게 라틴 아메리카로 탈바꿈 되었으며, 또한 새롭게 형성된 그들의 현대사는 또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안 마당으로 전략되었으며 그 안 마당의 곡간을지키기 위해 개 망나니들을 키우고 비호하며 이익을 챙겼다. 그렇기에 커다란 그 곡간을 둘러싼투쟁들이 중미와 남미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많다. 독립 이후에도 지독한 독재정권과의 치열한 민중 투쟁의 역사들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정치적으로 안정된 나라들도 있지만 아직도 부패한 정권과의 투쟁은 진행형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곳이 중미이다.


중미 국가들 현대사를 보면 어느 나라라고 할 것 없이 너무나 슬픈 민중들의 역사가 그 안에 담겨있다. 
 

        

< 이것이 파나마다 >


파나마 정말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중학교 지리 시간 때부터 익힌 파나마, 수에즈 운하는 전자가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것이라면, 후자는 지중해와 홍해를 이어 아프리카를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지름 항로인 것이다.


두 운하 역시 역사적으로 많은 아픔을 지닌 이름이다강대국의 논리가 지금도 그대로 적용되는 역사적 산물이면서 경제적으로는 절대로 그들에게는 빼앗길 수 없는 자본거점의 산실인 것이다.


    콜롬비아의 한 주였던 것을 강대국 미국의 힘에 의해 분할 독립되어 탄생한 파나마는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이 여전히 미치는 곳 이였기에 다국적 기업들이 손쉽게 뿌리를 내리며 자신들의 이익을 내는 물류 허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 중심에 파마나 운하가 있다.    거대 자본들이 만들어 놓은 마천루 도시의 빌딩 앞에서 남미 여타 도시와 다른 이질적 문화를 만나게 된다.


잘 가꿔진 도시를 따라서 가다 보면 이 도시에 힘에 놀라지만 그 빌딩들을 주위의 삶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하루를 악착같이 살아가는 서민들이다.

이렇게 달라도 다를 수가 있나 할 정도로 빈부의 격차가 심하게 느끼게 하는 

이 도시를 슬프게 하는 것도 어쩌면 내가 선입견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교하자면 브라질 리오에서 느끼는 감정과는 다른 것이다리오의 빈민가는 못살지만 그래도 생동감이 묻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라면 파나마의 빈민가는 건물에서 풍겨 나오는 슬픔이 겉에서부터 느껴진다.

나의 머리 속에 맴도는 이런 느낌이 파나마를 마지막까지 떠나면서도 내내 떨구어내지 못하였다.

이 도시를 오기까지 산블라스라는 오지의 섬들에서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은 문명과 동떨어진 파나마를 보다가 갑자기 물질문명이 넘쳐나는 정 반대의 도시를 보아서 일까 

    또한 파나마에서 코스타리카를 거쳐 니카라과로 육로 이동하면서 받은 느낌은 같은 대륙 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라는 것이다. 파나마가 빈부의 격차가 크고, 다국적 거대 기업들이 만들어 놓은 계획적인 국가라면 니카라과는 가난한 사람들이 뭔가를 해보려고 애쓰는 민중들의 치열함이 엿보이는 나라다. 그리고 코스타리카는 중미의 스위스답게 관광객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래서 인지 모르지만 전체 GNP 중 관광수입이 3위이다.   관광 인프라를 위해 잘 가꾸어진 도로망, 관광투어 상품들, 호텔들…… 파나마의 오지 섬에 있다 와서 그런지,   코스타리카에서 받은 인상은 내가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곳 받았다.

갈 만한 곳은 전부 관광 상품화된, 너무나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어, 실제로 여행자가 마음 놓고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적은 곳이 또한 코스타리카이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코스타리카는 1949년 이후 군대가 폐지된 나라라서 그런지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언제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나라 중에 하나였는지 모른다, 또한 국토의 거의 절반이 원시림이면서 국립공원으로 보호 받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도시처럼 잘 가꿔진 자연 공원이 아니라 원초적인 상태의 모습을 보호하여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곧 이 나라 관광정책인 것이다

      그것을 보기 위해 유럽과 북미의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은 살아있는 자연의 모습에 탄성을 지어낸다.


또한 다른 중미의 나라에 비해 이 나라는 백인이 월등하게 많이 살고 있는 나라이다.


물가는 유럽 수준 정도로 다른 중미 나라에 비해 높아서 배낭여행객들이 오래 머물고 싶어도 빨리 떠나게 만드는 곳이다.

 


 수도 산호세를 여행하고 나서 니카라과로 가기 위해 중간에 위치한 아레날 화산과 리베리아 국경마을을 선택하여 바쁘게 일정을 재촉하였다. 여타 중미의 국가들도 비슷하지만 코스타리카는 태평양과 카리브해를 양 옆으로 끼고 있으며 가운데로 북미의 로키산맥과 남미의 안데스산맥을 연결하는 산지와 고원지대로 많은 화산들을 가지고 있다. 양쪽 지역이 더운 아열대 기후라면 가운데는 봄/가을 날씨라고 느껴지는 곳이지만 그래도 한낮에는 덥다.

아레날 화산을 원뿔모양으로 두고 다양한 투어 상품들이 있는데, 난 오전에는 아레날 산을 오르는 산행과 저녁에는 열대지방에서 즐기는 노천 온천을 선택했다. 아레날 산은 전체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어 산행을 하기 위해서는 전문 가이더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관광회사를 통해 신청한 단 2명을 위해 배치된 티카 버스와 한 명의 전문 안내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들의 일들을 너무나 친절하고 완벽하게 처리한다
 
 나무 하나 하나 그 숲에 살고 있는 새들과 동물들의 이름까지 그리고 망원경으로 살펴 보라고까지 권한다. 마지막 안개 낀 화산 산의 절경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일정을 끝내고 늦은 시간 온천을 하러 갔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붐비지 않는다.

  온천의 규모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 정말 크고 다양해서 자신이 좋아하는 온천 탕에서 맘껏 즐기면 된다.

  

 숙박은 백버거 인이라는 호스탈의 도미에서 했는데 지금까지 묵었던 호스탈보다는 럭셔리하면서도 가격은 다른 곳에 비해 저렴해서 묵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산호세에서 머물렀던 갈릴레오 호스탈이 배낭여행객들에게는 부담 없이 요리도 하면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면, 이 곳은 쉬기 편하게 모든 것들이 세심하게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관광지이다 보니 소소한 모든 것들 조차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아레날에서 코스타리카 북쪽 리베리아로 가는 길은 아레날 호수를 끼고 장시간 가는 환상의 풍광을 느끼게 하는 차도이다. 호수와 또 다른 화산 산들 그리고 작은 마을들까지 거대한 풍경화를 펼쳐 놓은 것 같아 잠시 스위스나 북유럽의 산천을 온 것 같은 느낌으로 여행객의 눈을 잠시도 떼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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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 홋카이도 여행을 통해 아이누 공동체. 아이누 학교를 운영하고 계시는 키타가와 시마코 (아이누 민족운동가)여사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간 기간이 방학 기간이여서 학생들이 없었는데 일본 전역에서 활동가들이 와서 자원봉사로 이루어진 비인가 대안학교이다.   그곳에서는 학생들에게 아인누 문화와 글, 언어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현재 학생들이 점점 줄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아파왔다.

 삿뽀로에서도 차로 4시간 정도 들어가야 마을이 나오기에 외지인들의 방문이 낯설게 보였지만 시마코 여사님은 이미 2001년에 한국을 방문해서 아이누 실상에 대해 강연도 한 적이 있는 분이다. 그 때 한국 사람들에 대한 좋은 감정이 대단해서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주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많은 아이누 관련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지 모른다.

 

    제대로 전부 이해 하기는 힘들었지만 아이누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아이누인들에게 일본인들이 ‘너희 조상은 한국인이니 한국으로 가라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는데 시마코 님은 아마 자기 조상이 한국인일지도 모른다며 그렇기에 우리를 더욱 반기셨다고 한다. 떠나는 우리들에게 손수 만든 손가방, 수제품들과 아이누 동화책 등을 주시면서 꼭 다시 한 번 또 오라고 하시던 그 모습이 잊혀 지지 않고 있다.  한 번은 글을 써야지 하면서도 아직까지 아이누관련 글을 쓰지 못했던 이유는 짧은 만남 속에 전해오는 절절함을 표현할 수 없어서인지 모른다. 

 

작년 아프리카 여행 중에도 그 곳의 선주민들을 만나면서 아이누 선주민들이 생각났었다.

다른 비유겠지만 제주도의 경우 그곳에서 자신들의 터전에서 삶을 살고 있는 선주민들의 경우 현재 대다수가 관광산업 (호텔 종업원, 골프장 케디, 택시기사, 기념품 판매, 식당 등) 종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관광으로 땅 값이 올라가더라도 정작 돈을 버는 사람들은 그곳에 호텔을 짓고 골프장을 짓는 거대 자본이다. 대다수의 주민들이 거기에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 

 

  하와이 선주민들의 삶도 역시 처음부터 관광객을 상대로 ‘알로 하와이’나 추는 민족은 아니지 않은가?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대륙 전체가 가난으로 몰린,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대륙이 1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로 변해버린 작금의 현실은 그 곳을 침략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죽지 않을 만큼의 기부와 원조를 통해 사회적 문제와 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이제는 아프리카의 문제가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닌 자신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전 세계 경제를 파국으로 몰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빌게이츠도 아프리카 문제를 풀 수만 있다면 자기 재단의 돈을 다 써도 좋다는 말을 했을 정도니 아프리카 문제를 해결해야 컴퓨터도 팔 수 있다는 계산이 들어간 고도의 경제적인 핵심의 속성을 내 뺍고 있다.

 

 식민지 아니면 제국주의 중 둘 중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냉험한 역사는 현실 속에서도  빼앗긴 자들과 뺏긴 자들의 관계로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나는 진행형이다. 그 안에서도 자본의 감쳐진 야수성은 여지없이 들어난다.  그 야수성에 대한 투쟁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고 계속 될 수밖에 없다.  

   

< 아이누에 대해 >

 아이누는 원래 아이누어로 ‘인간’을 뜻하는 말이다.

이들의 땅, ‘아이누모시리(아이누어로 인간의 대지를 의미)’에서 아이누가 소수자의 위치로 밀려나면서 일본에 강제로 편입된 과정은 수 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에도시대 이래 몇 백년간 일본인은 아이누 민족, 아이누 모시리 전지역, 즉 홋카이도뿐만 아니라 쿠릴 열도와 사할린(카라후토)에 대해 도대체 무슨 일을 해왔는가를 보면 일본의 침략성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일본인은 무기를 가지고 아이누 모시리를 대상으로 아이누 민족 박멸작전을 몇 번이나 실행해 왔다. 거기에 대항하여 아이누 민족은 1457년 쿠샤마인 전투, 1669년의 샤구샤인 전투, 1789년의 쿠나시라와 매나시리 봉기를 통해 무장하여 싸웠다.

 

  본격적인 정벌의 역사는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국가가 수립된 뒤 시작되었다.  1869년 개척사(開拓使)를 설립하고 에조치라는 명칭을 홋카이도[北海道]로 바꾸었다. 1899년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 구토인 보호법>을 만들었다.  본토 인구 증대로 인한 영세 농어민을 홋카이도로 집단으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아이누인들의 토지의 수탈, 강제이주를 시켰으며 여기에 반항하는 이들은 학살당했으며. 개척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아이누인들을 구토인(舊土人)이라고 부르며 민족 말살의 동화 정책을 펼쳤다. 근대 국가 ‘일본’과 아이누 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문명의 ‘진보’를 상정한 진화론적 시각에 입각한 것이었기에, ‘미개하고 열등한’ 존재인 ‘구토인’ 아이누는 동화교육을 통해 일본인과의 차이를 분쇄시켜야만 ‘문명화’될 수 있는 존재로서 간주되었다.

 

 아이누를 개명(開明)시킨다는 명목으로 풍습의 개변(改變)을 강요하였고, 아이누의 언어와 전통적 생활양식은 금지되었다. 아이누가 가지고 있었던 어획권과 어로방식도 무시되었고, 아이누는 농업과 목축을 강요당했다. 이로써 오랜 기간 어로와 수렵, 채집 등을 위주로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꾸어왔던 아이누의 전통적인 문화는 급속히 파괴되었으며, 대대적인 학살과 약탈과 침략과정에 유행성 질병(천연두, 콜레라, 매독 등)과 감염으로 저항력인 약한 아이누인들의 인구는 격감되었고 특히 성 침략으로 인한 매독의 만연을 수반했다.

 

아이누 민족의 종교적 의식, 조상들의 묘지와 주거지들이 파괴, 수렵과 연어 포획을 자유롭게 하던 것이 일본인의 손에 관리하게 하였다. 대다수 선주민들이 그러하듯이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겨버린 이들이 선택하는 것은 자신들의 터전을 찾아 더 깊숙이 들어가거나 침략자들의 하수인으로 전략된 삶을 타자들에 의해 강제 받게 되는 것이다.

 

 메이지 시대 이래의 일본은 아인누 모시리에 대한 침략과 동시에 아이누 민족을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 희생되었으며, 일본의 국가에 이용된 뒤 버려졌다.

 

 최근 일본정부는 아이누 민족을 ‘일본의 소수민족’으로 인정했지만, 결코 선주(先住)민족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거기에는 아이누 모시리에 대한 침략과 함께, 가혹한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토라리 현의 원자력 발전소, 핵폐기물 처리, 저장, 연구시설 호로노 비쵸,  골프장 건설, 산림벌채, 리조트 개발 등이 개발이라는 명복으로 진행되고 있다.


 정신대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의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자국 내 문제인 아이누 대한 공식적인 사과의 부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듯이 제국주의 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한 그들의 사과를 받는다는 것은, 일본 정부가 아이누인들에게 대해 전향적인 자세로의 전환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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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미와 남미는 지도상 이어진 대륙이지만 엄밀하게 정치적 목적으로 갈라진 대륙이다. 미국은 중미와 남미 소통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였다. 파나마운하를 정점으로 중미는 미국의 시장 안으로 들어와 있으며, 파나마 남부는 자동차로 운행이 불가능한 정글 숲과 자연 장애물로 가득 찬 오지, 이름하여 Tapón de Darién이라는 곳이다. 오로지 국경을 두 다리와 작은 보트에 의지해 건너 가거나 아니면 파나마에서 직접 비행기를 이용하여 남미로 갈 수 있으며,  또한 작은 범선과 요트로 3-6일 정도 걸려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요금은 상상외로 물론 비싸다. ( 400달러 이상)

파나마에 가기 위해 내가 선택한 길은 콜롬비아와 파나마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마을 카프르가나(Capurgana)라는 곳이다. 모든 길안내는 한 달 전에 콜롬비아 전 지역을 여행한 에스페란티스토 Marcelo의 친절한 안내를 착실하게 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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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언제나 내 위치를 물으며 다음 이동 장소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보내와 배낭 여행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경로로 콜롬비아 북서부를 바제두파루(Valledupar)에서 카르타헤나(Cartagena)- 몬테리아(Monteria) –투르보( Turbo)로 이어지는 여행을 즐길 수가 있었다. 콜롬비아의 코파카바나 해변이라고 할 수 있는 카르타헤나 도시는 태평양풍의 바다와 카리브풍의 음악이 넘쳐나는 젊음의 도시이다. , 밤의 문화가 상반되게 어울러져 이 도시를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몬테리아 투르보로 이어지는 길은 반 정도가 비포장 도로인데, 그것도 계속되는 산길과 그 안에 거주하는 작은 마을들을 지나가기 때문에 지도 상의 거리는 짧지만 카르타헤나- 몬테리아 길보다 배 이상 소요된다. (6시간 소요)

  또한 투르보 선창가에서 아침(8)에 출발하는 카프리가나로 가는 란초(작은 보트)를 타기 위해선 아침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카프리가나로 갈 수 없다. (하지만 배는 정작 콜롬비아 시간으로 1-2시간 늦게 출발한다 

배로 2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카프리가나는 왜 이 곳이 카리브 해안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바다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승객 20명 정도 태운 이 배는 카리브의 절경을 사진에 담는 것을 허락치 않겠다는 듯, 위 아래로 심하게 요동을 치기에 오로지 눈과 입으로만 감탄하며 아픈 엉덩이를 참아내야 하는 고통이 따른다.

 

나는 카프리가나에서 Marcelo가 추천한 Hotel Uvita에서 3일에 15달러에 지냈고, 삽쓰루(Sapzurro)라는 곳에서 하루를 더 묵었다. 삽쓰루는 카프리가나에서 배로 30분이면 가는 작은 어촌이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마을처럼, 시간이 정지된 듯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방인들을 평온하게 대한다. 혼자서 조용히 사색을 즐기려는 사람에게는 이 곳이 파라다이스일 것이다.

 

l  : 교통/ 배 요금

Valledupar – Cartagena : 14달러

Cartagena – Monteria : 16.7달러

Monteria – Turbo : 16.7달러

Turbo – Capurgana 배요금 : 25달러

Capurgana – Panama Obaldia  배요금 : 125달러 

Capurgana - Sapzurro 배요금 : 5달러

Capurgana – Sanblas 배요금 : 50달러

 

< 여행 중 만난 사람들 >

 

Carolina, Paola, Juan Pablo, Jorge, Hector 이 다섯 명은 내가 카프리가나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2팀이 칠레 커플이고 한 명은 헥토르라는 모험과 여행을 즐기는 아르헨티나 젊은 친구이다. 직업도 간호사, 수학교사, 회사원, 판매사원, 변호사 다양하다. 이들은 나처럼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이번 여행을 시작한 친구들이다. 그것도 중미의 오지 섬들을 여행하기 위해서  여행을 즐기는 친구들.. 난 이 친구들과 파나마의 산블라스 군도(정확하게 : 아르치피에라고 데 산블라스 Archipiélago de San Blas ) 에서 일주일을 함께 보냈다. 군도는  대서양 카리브 해안에 위치해 350 개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는 영화에서나 있는 그림들을 제공한다.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오지의 섬들, 야자수와 그것으로 만들어진 작은 인디오 집들, 섬 하나에 한 채의 집..  상상하지 못하는 그림들이 주위에 펼쳐지기에 그것을 탐험하는 우리들은 매일 바쁘다.  새 파랗다 못한 바다가 그 속을 훤히 볼 수 있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색과 오색 창연한 열대어들이 가득한 바닷속을 매일 뒤지게 한다.  난 그림 같은 바다의 신비함을 처음 보았기에 매일 탄성을 지어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도 장관이지만 석양과 함께 섬들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듯한 황홀한 모습을 내 작은 사진기로 담아낼 수 없음에 그저 한탄할 뿐이었다.

 

우리는 인디오 집의 해먹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해먹은 여행 중 잠깐 낮 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려고 이용을 하였는데 장시간 잠을 자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첫 날 자고 나서 허리가 아파 헥토르한테 물어보니 해먹은 대각선으로 자야 허리 통증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 3달러에 잠자리를 제공한 인디오 피침의 집은 대가족이다. 처제들의 식구들을 비롯하여 식구의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많은 가족들의 숫자는 온 가족이 함께 야자수로 엮은 집에서 함께 산다. 우리는 잠만 이 집에서 자고 식사는 마을회관 비슷한 곳에서 해결을 했다. 다행이 가스렌즈를 빌려줘 가져간 부식으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4일째 되는 날부터 모든 것들이 동이나 인디오들의 신세를 져야 했다. 그래도 건너 섬에 가게가 있어 배를 타고 가서 부식거리들을 사오곤 했다. 배로 학교에 다니고 배로 시장을 보는 섬마을들..

요즘은 파나마 정부가 산블라스를 관광화 한다고 해서 유럽과 미주의 사람들이 비싼 돈을 들여 투워를 하고 있기에 너무나 착하고 순수한 이 인디오들이, 하와이 인디오처럼 알로에 하와이나 외치면서 그들에게 하와이안 댄스나 추는 관광 상품화된 모습으로 바끼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일주일을 머물면서 난 이 곳에 너무 정이 들었다. 그리고 내 언어 소통을 끝까지 웃으며 즐겁게 받아준 친구들과 정이 많이 들었다. 반쯤은 에스페란토로 뭉개며 대화를 했지만 난 이 곳에서  에스페란토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동안 남미를 여행하면서 에스페란티스토가 있기에 늘상 든든한 우군이 뒤에 버티고 있어 아무 걱정 없이 여행 할 수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여행의 진정한 참 맛을 느낄 수 있는 홀로 만의 여행인 것 이다.  난 이 곳에서 친구들에게 실전 에스파뇰와 배낭여행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다. 매일 밤마다 파플로가 가져온 칠레산 삐스코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특히 이번 여행을 위해 수중 영상장비까지 구입한, 여행 배테랑인 헥토르는 끝낼줄 모르는 수다와 유머를 가지고 있어 언제나 함께한 이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한 달을 계획해 오지 섬들을 탐험하는 이들을 뒤로 하고 나는 그 섬을 나와 파나마 시티로 향했다. 아쉬운 이별은 언제나 서로에게 찐한 감동을 선사한다. 아침 일찍 떠나는 나를 위해 그들 만의 키스 세레와 포옹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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